대부분의 아빠들은 딸을 예뻐하지만, 우리 아빠는 유난히도 딸을 예뻐하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빠는 지방출장 중이었는데,
당시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던 새마을호를 타고 올라오셨다고 한다.
"절약, 성실"을 항상 강조하시면서 불필요한 지출을 싫어하시던 분인데 말이다.
처음으로 나를 봤을 때, 보통 신생아처럼 빨갛고 쭈글쭈글할지 알았는데,
뽀송뽀송 뽀얗던 모습이 기억나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때 눈이 너무 커서 깜짝 놀라셨다는 이야기도 함께 해주셨다.
목욕시킬 때도 너무나 얌전히 있어서 힘든지 몰랐다는 우리 아빠.
요즘 이슈화되고 있는 딸바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배고파도 울지 않던 내가, 유일하게 우는 때는 장난감 말 수레(?) 할아버지가 오는 때였다고 한다.
아빠는 내가 유일하게 조르는 일이었기에 모든 일을 재쳐두고 그 말에 나를 태워주셨고,
나중에는 그 할아버지가 우리집 앞을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는 말을 좋아한다.
어린시절에는 아빠와의 추억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빠는 사업때문에 너무 바쁘셨기 때문이다.
아빠와의 추억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우리집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을 무렵인 것 같다.
여러 문제들이 겹치면서 아빠는 사업을 정리하게 되었고, 집에 계시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빠가 집에 계시는 게 더 좋았다. 그 시기가 없었다면 아빠와의 추억은 거의 없을테니까.
아빠가 집에 계시게 시작했었을 때,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고, 중학교 시기를 지나면서 방황도 많이 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대학에 꼭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도시락을 쌀 형편이 안되서 점심시간에는 잠만 잤고, 아르바이트 생활도 병행했었다.
집에서는 잠만 잤기 때문에 아빠와 대화할 시간은 줄어들었고,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 편지들은 이사갈 때마다 가장 먼저 챙기는 나의 큰 보물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아르바이트는 끝낼 수 없었다.
장학금을 받은 학기도 있었지만, 학비만 벌어서 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대학시절에 공부와 아르바이트만 한다는 것이 너무 아까워서, 과와 동아리 활동도 최대한 참여했었다.
매일 바쁘게 지냈고, 화장품이나 옷에 쓸 돈이 아까워 꾸미지 않고 다녔던 내게, 아빠는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었다.
"우리 딸, 아빠 딸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공주처럼 살았을텐데..."
아빠는 내가 대학생 때 위암말기로 돌아가셨다.
하룻밤 꼬박 괴로워하시며 돌아가셨는데, 그 중에 잠깐 정신이 돌아오셨을 때가 있었다.
초점은 흐려진 눈으로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아빠가 나에게 했던 마지막 한마디,
"미안해. 아빠가 미안해. 우리딸... "
아빠 손을 잡고 둘이서만 밤새 있었던 병실에서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나는 독립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아두었던 돈과 몇몇 선배님들께서 빌려주신 돈을 가지고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집에 살았던 이유와 친척집에 갔던 이유는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것들에 아무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친척이라는 분들에게 뒷통수 맞은 일이 가장 크긴 하지만...
아빠의 딸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던 우리 아빠.
하지만 경제적인 부분만 제외하면, 더할나위없이 좋았던 아빠였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아빠의 이야기를 가끔씩 이렇게 풀어내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아빠의 딸로 태어나서, 아빠와 함께할 수 있어서, 무척이나 행복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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